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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굳건히 지켜온 차세대 구강 항응고제(NOAC) ‘엘리퀴스(성분명 아픽사반)’가 거대한 변화의 물결 앞에 섰다. 글로벌 제약사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퀴브(BMS)와 화이자가 공동 개발한 엘리퀴스는 그간 탁월한 효능과 낮은 출혈 부작용을 무기로 전 세계 심혈관계 시장을 지배해왔으나, 주요 특허 만료를 기점으로 저가 제네릭(복제약)의 거센 공습이 시작되었다. 연간 국내 시장 1,000억 원, 글로벌 시장 20조 원에 달하는 거대 시장의 주도권을 놓고 벌어지는 이번 대결은 제약 산업의 판도를 뒤흔들 ‘골든아워’가 될 전망이다.
엘리퀴스는 비판막성 심방세동 환자의 뇌졸중 예방과 심혈관계 질환 치료에서 이른바 '골드 스탠다드'로 통한다. 과거 수십 년간 항응고 시장을 독점했던 와파린(Warfarin)은 까다로운 식단 관리와 주기적인 혈액 검사(INR 모니터링)를 통한 용량 조절이 필수적인 치명적인 번거로움이 있었다. 엘리퀴스를 필두로 한 NOAC 제제들은 이러한 불편함을 단번에 해소하며 시장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특히 엘리퀴스는 경쟁 약물인 자렐토(리바록사반)나 프라닥사(다비가트란), 릭시아나(에독사반) 등에 비해 위장관 출혈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임상적 우위를 입증하며 독보적인 위치를 점해왔다. 하지만 제약 산업의 냉혹한 규칙인 '특허의 절벽(Patent Cliff)'은 엘리퀴스에게도 예외 없이 다가왔다. 2024년 9월을 기점으로 핵심 물질특허가 만료됨에 따라, 그간 누려온 독점적 지위가 해제되고 무한 경쟁 체제로 돌입한 것이다.
국내 제약사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엘리퀴스의 특허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치열한 법적 공방을 이어왔다. 특히 '물질특허'를 둘러싼 소송은 국내 제약 산업 역사에 남을 만큼 극적인 반전을 거듭했다. 당초 국내사들이 1심과 2심에서 승소하며 제네릭이 조기에 출시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2021년 대법원이 오리지널사의 특허권을 최종 인정하며 이미 출시된 제품들이 시장에서 철수하고 거액의 손해배상 문제가 불거지는 등 혼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2024년 9월 9일자로 물질특허가 완전히 만료되면서 법적 리스크는 사라졌고, 이제는 순수한 제품력과 마케팅의 대결인 '제네릭 시즌 2'가 개막했다. 가장 먼저 시장 선점에 나선 것은 종근당이다. 종근당은 강력한 영업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리퀴시아’의 점유율 확대에 전사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유한양행과 삼진제약 역시 전통적인 항혈전제 시장의 강자로서 신뢰도 높은 브랜드 파워를 앞세워 병·의원 처방 코드를 빠르게 확보 중이다.
국내 제약사들은 단순히 똑같은 복제약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차별화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한미약품은 심방세동 환자들이 흔히 동반하는 고혈압이나 이상지질혈증 치료제를 한 알에 담은 '복합제'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이는 환자의 복용 편의성을 획기적으로 높여 오리지널이 가지지 못한 영역을 공략하는 전략이다.
보령과 대웅제약 등은 알약의 크기를 최소화하여 고령 환자가 삼키기 쉽게 만들거나, 용량을 세분화하여 맞춤형 처방이 가능하도록 하는 등 세밀한 차별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이들 제약사의 1차 목표는 '우선판매품목허가(우판권)' 기간인 9개월 동안 최대한 많은 종합병원 약사위원회(DC)를 통과하는 것이다. 항응고제 특성상 한 번 처방이 시작되면 약을 바꾸기 어려운 '스위칭 장벽'이 높기 때문이다.
글로벌 빅파마인 BMS와 화이자는 '데이터의 힘'과 '차세대 파이프라인'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들은 수십만 명의 환자를 통해 검증된 대규모 리얼월드 데이터(RWD)를 강조하며, 생명과 직결된 질환에서 '검증된 안전성'이라는 장벽을 세우고 있다. 또한 암 환자나 소아 환자 등 특수 적응증 분야를 강화하는 '에버그리닝(Evergreening)' 전략을 병행하고 있다.
더욱 강력한 카드는 차세대 기전인 'Factor XIa 억제제'의 개발이다. 현재의 엘리퀴스보다 더 상위 단계의 응고 인자를 타깃으로 하는 이 신약은, 지혈 기능은 보존하면서 혈전 형성만 차단해 출혈 부작용을 거의 '제로'에 가깝게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오리지널사는 제네릭이 시장을 잠식하기 전에 치료의 패러다임 자체를 다음 세대로 전환하여 다시 한번 독점적 지위를 구축하겠다는 원대한 복안을 추진 중이다.
엘리퀴스 특허 만료는 환자들에게는 경제적 부담 완화와 치료 접근성 확대를, 국내 제약사들에게는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항응고제는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만큼, 단순한 가격 경쟁력보다는 의료진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임상적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최종 승부처가 될 것이다.
왕좌를 지키려는 글로벌 빅파마와 이를 탈환하려는 종근당, 한미약품 등 국내사들의 치열한 수 싸움 속에서,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될지 전 세계 의료계와 산업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