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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Doc Health] 1,400만 명의 시한폭탄 '고혈압': 침묵의 살인자와 제약업계의 4차전
  • 박정민 기자
  • 등록 2026-02-06 08:5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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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고혈압학회에 따르면 국내 20세 이상 고혈압 유병자는 약 1,374만 명(2022년 기준)으로 추산된다. 국민 3~4명 중 1명이 고혈압 환자인 셈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숫자가 주는 공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침묵'이다. 뚜렷한 자각 증상이 없어 방치되는 사이, 혈관은 서서히 망가지고 뇌졸중과 심근경색이라는 치명적인 청구서를 내민다. 의료 현장과 제약 시장은 지금 이 '침묵의 살인자'를 잡기 위해 총성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고혈압의 가장 큰 딜레마는 '인지율'과 '조절률'의 간극이다. 통계에 따르면 고혈압 환자 중 자신이 환자임을 인지하는 비율은 약 70% 수준이며, 약물을 통해 혈압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조절률은 50% 안팎에 머물러 있다. 나머지 절반은 치료 사각지대에서 혈관이 망가지는 것을 방치하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2030 세대의 '젊은 고혈압' 증가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서구화된 식습관, 비만, 스트레스, 짠 음식 섭취 등으로 인해 20~30대 고혈압 환자가 지난 5년 새 30% 이상 급증했다. 하지만 이들의 인지율은 20%대에 불과하다. "나는 젊으니까 괜찮다"는 안일함이 조기 뇌졸중과 신장 투석 환자 증가의 주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과거 수축기 혈압 140mmHg, 이완기 혈압 90mmHg였던 고혈압 진단 및 치료 기준은 최근 더욱 엄격해지는 추세다. 미국심장학회(ACC)가 기준을 130/80mmHg로 대폭 낮춘 데 이어, 국내 학계에서도 심혈관 질환 위험군에 대해서는 목표 혈압을 더 낮게 잡을 것을 적극 권고하고 있다. 이는 혈압이 115/75mmHg에서 20/10mmHg씩 오를 때마다 심혈관 질환 사망 위험이 2배씩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에 근거한다.

 

치료법 역시 진화했다. 1차적으로는 염분 섭취 제한(하루 6g 이하), 체중 감량(DASH 식단), 금연 등 생활 요법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조절되지 않을 경우 즉각적인 약물 치료가 시작된다. 약물은 크게 ▲이뇨제 ▲베타 차단제 ▲칼슘 채널 차단제(CCB) ▲안지오텐신 전환효소 저해제(ACEi) ▲안지오텐신 수용체 차단제(ARB) 등 5가지 계열로 나뉜다. 최근 임상 현장에서는 부작용은 줄이고 효과는 높이기 위해 서로 다른 기전의 약물을 처음부터 섞는 '병용 요법'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고혈압 치료법의 진화 [Gemini 생성 이미지]

국내 고혈압 치료제 시장은 연간 2조 원 규모를 상회하는 거대 시장이다. 이 시장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국내외 제약사들의 경쟁은 치열하다. 그중에서도 국산 신약의 약진은 독보적이다.

 

보령(구 보령제약)의 '카나브(성분명 피마사르탄)'는 국산 신약 15호이자, ARB 계열의 대표 주자다. 2011년 출시 이후 강력한 혈압 강하 효과를 앞세워 단일제 시장을 평정했다. 카나브는 단순한 혈압 강하를 넘어 단백뇨 감소 등 신장 보호 효과까지 입증하며 'K-블록버스터'의 신화를 썼다. 보령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카나브에 이뇨제나 CCB 계열 약물을 섞은 '카나브 패밀리(듀카브, 투베로 등)' 라인업을 구축, 연 매출 1,600억 원대를 돌파하며 다국적 제약사의 오리지널 약물들을 압도하고 있다.

 

현재 고혈압 시장의 대세는 단연 '복합제(Fixed-Dose Combination)'다. 고혈압 환자의 대다수가 고지혈증, 당뇨병 등을 동반하고 있어 하루에 먹어야 할 알약 개수가 너무 많다는 점에 착안한 '편의성' 전략이다.

 

한미약품은 복합제 시장의 개척자다. 고혈압 치료 성분인 암로디핀(CCB)과 로사르탄(ARB)을 합친 아모잘탄은 출시 후 누적 처방 매출 1조 원을 넘기는 기염을 토했다. 한미약품은 '한국형 개량신약'의 강자답게, 고혈압 약 2개와 고지혈증 약 2개를 한 알에 담은 4제 복합제 '아모잘탄엑스큐'까지 출시하며 기술적 해자를 구축했다.

 

대웅제약 역시 올메사르탄 성분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복합제 라인업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고혈압과 고지혈증을 동시에 잡는 '올로스타', '올로맥스' 등의 품목을 주력으로 육성하며, 자체 개발한 위장관 손상 최소화 기술 등을 접목해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이처럼 제약사들이 복합제 개발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명확하다. 단일제 특허 만료에 따른 약가 인하 충격을 방어하고, 만성질환 관리의 핵심인 '복약 순응도(약을 제때 챙겨 먹는 비율)'를 높여 시장 점유율을 확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카드이기 때문이다.

 

약물 치료를 넘어, 기술(Tech)과 결합한 고혈압 관리도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삼성전자의 갤럭시 워치 등 웨어러블 기기를 통한 24시간 혈압 모니터링 기능이 의료기기로 허가받으며 일상 속 혈압 관리가 가능해졌다. 이는 병원에서만 혈압이 높게 나오는 '백의 고혈압'이나, 반대로 병원에서는 정상이지만 집에서는 높은 '가면 고혈압'을 잡아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웰트(WELT) 등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들은 불면증 치료 앱에 이어 혈압 관리를 위한 디지털 치료기기(DTx) 개발에도 뛰어들었다. 이는 약물 처방 전 생활 습관 교정을 돕는 소프트웨어로, 향후 고혈압 치료의 강력한 보조적 수단이 될 전망이다.

 

고혈압 치료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루 한 알만 먹어도 혈압과 콜레스테롤이 동시에 조절되는 시대다. 제약사들은 끊임없이 더 편하고 효과 좋은 '올인원(All-in-One)' 약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전문의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아무리 좋은 명약(名藥)도 환자가 생활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고혈압은 완치되는 병이 아니라 평생 친구처럼 달래며 가야 하는 '관리하는 병'이다. 정기적인 혈압 측정, 싱겁게 먹기, 체중 조절, 그리고 꾸준한 약물 복용이라는 기본(基本)이 지켜지지 않는 한, 제약사의 화려한 기술도 1,374만 명을 위협하는 이 거대한 침묵을 깰 수는 없다. 지금 당장 당신의 혈압 수치를 확인하는 것, 그것이 건강 수명을 늘리는 첫 번째 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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